한중연 사람들

함께 힘을 더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인생공부를 하고 있어요

열정을 더한 분야는 빛이 나게 마련이다. 영문편집인으로서 맡은 일을 사랑하고 좀더 나은 한국학 학술지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출판문화부 학술지간행실의 고찬미 선생을 만나보았다


고찬미 사진

하시는 일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출판문화부 학술지간행실에서 영문학술지 발간을 맡고 있습니다. 논문 기획부터 학술지 출판까지의 전 과정을 책임지고 있지요. 그래도 그 중 영어 논문의 편집에 가장 큰 공을 들이며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편집인으로서, 국내외 연구자 독자들을 만나기 이전 논문의 첫 번째 독자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 힘든 부분이 많은 고된 일입니다. 이미 훌륭한 수준의 논문들이지만 좀 더 가독성 있고 일관적 흐름을 가질 수 있는 논문으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영문학술지 업무를 하게 되신건가요?


저는 학부부터 박사과정까지 줄곧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영문학 분야에서도 16~17세기 영시를 전공하고 영어 강의를 하다가 정말 뜻하지 않게 여기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오게 됐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박사학위 취득 이후에 우연히 본원 영문학술지 편집인 구인 공고를 보고 나서 무심코 지원했다가 바로 취업이 된 케이스입니다. 처음부터 어떤 계획이나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죠. 취업이 급선무인 상황 속에서 대학원 시절 영문학술지 편집 조교 경험과 더불어 박사학위 논문 집필로 다져진 영어 논문 작성 능력 덕분에 이곳에 오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일을 시작할 수는 있었지만 어떠한 준비나 초심 없이 단지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던 직장인의 모습으로 이곳에서의 제 첫 업무가 시작된 거죠.


계획하지 않았던 분야라서 힘든 상황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원래 제가 한국학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사실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가야할 길이 맞는가라는 큰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죠. 그런데 한 선배가 제게 기존에 하던 공부와 다르지만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더 해 지식의 지평을 넓히고 경쟁력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제 마음을 크게 움직여 결국 이곳으로 오게 됐죠. 그런데 이 영문학술지 주제범위가 한국학 제 분야이기 때문에 정말 녹록치 않았습니다. 편집을 할 때 논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을 해야만 하는데 그러다보니 이에 시간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국학 분야의 국내외 연구자 POOL도 거의 없는 맨바닥 상황이라 업무에 있어 생소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경험이 점점 쌓이면서 다양한 한국학 분야를 접해나가게 됐고 더불어 한국학 공부도 자연스레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구자들과 교류하는 부분에 노력을 더한 덕분에 이제는 일을 하면서 그분들께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고 제가 때로는 도움을 드리는 상황도 생겨 정말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영문학술지 발간은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논문을 쓰는 것은 철저히 혼자만의 작업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논문이 학술지에 나오기까지는 편집인인 저를 포함해서 심사자, 번역자, 출판사 등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래서 학술지 발간은 제한된 시간 내에 성공적 협업을 이끌어내야만 하는 데,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조율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 참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라 함께 힘을 더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점점 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인생 공부까지 더하게 된 것 같습니다.

덧붙여서, 영문학술지 발간 업무를 하면서 자연스레 학술논문의 유통과 배포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는데 학술DB업체를 통한 디지털 논문의 배포가 독점계약 형태로 상당히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어 개인적으로 안타까움이 큽니다. 또 한국의 연구 문화가 무한경쟁의 논문 양산으로만 흘러가는 것도 보기 답답한 상황이었죠. 그런 와중에 학술정보와 논문은 공공의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서 공유되어야 한다며 이 인식의 전환을 절실히 요구하는 민간학술단체 <지식공유연대>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뜻을 모아 협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장은 학술논문의 공유, 즉 Open Access를 실현시키고자 하며, 이 운동을 통해 연구자 문화 또한 사회적 기여도와 공공성을 높일 수 있도록 개선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입니다. 저는 연구자와 동시에 학술지 편집인으로서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이 연대 운동에 참여하고 본원 학술지간행실과의 협업을 맺는데 다리 역할을 하면서 이 운동에 일조해나가고 있습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지만 제가 하는 일이 한국의 연구문화 풍토에 신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이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제 일을 한층 더 사랑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인 여가시간은 무얼 하며 보내시나요?


저는 소위 ‘클알못’으로 클래식을 어려운 음악으로만 생각해왔던 사람인데, 몇 년 전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신드롬이 일어나도 저와는 상관없는 일로만 여겼었건만 어느 날 조성진이 연주하는 쇼팽의 “폴로네이즈 A플랫 장조 53번”을 우연히 듣고서 무슨 마법에 걸린 듯 클래식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죠. 물론 조성진 음반이 시작이었고 다른 다양한 연주자와 클래식 곡들을 마구잡이로 찾아 듣다 보니 이제는 운전할 때나 혼자 있는 시간에 클래식 음악과 항상 함께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저 자신을 당당히 ‘클알못’이라고 합니다. 클래식 듣는 것을 즐길 뿐이지, 고전 음악과 그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야 된다는 생각은 없기 때문이죠. 취미나 관심사에 꼭 정통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늘도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친 저를 편히 달래주는 음악을 머리로 굳이 어렵게 알지 않아도 몸으로 느끼면 그저 되는 거 아닐까요? ^^


특별히 좋아하시는 곡이 있으신가요


이작 펄만의 연주

바이올린 사진

심취해 배우고 있는 바이올린

제가 공연을 보러 갈 때 첫 번째 선택 기준은 연주자보다 연주곡 프로그램입니다. 좋아하는 작곡가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차이코프스키를 가장 좋아하고 특히 그의 곡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번호 35번을 연주하는 공연이 있으면 다른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보러 갈 정도입니다. 좋아하는 이유를 굳이 찾자면, 제가 바이올린 음색을 좋아하고 이 곡은 대중에게도 많이 친숙한 작품으로 화려함과 풍성함, 역동적 전개가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의 매력을 보여주는 이 곡이 너무 좋아서 뒤늦은 나이에 바이올린 배우는 것을 도전하기까지 했죠. 아직 1년 좀 넘게 배워서 초보이지만 평생 안 쓰던 근육을 쓰고 자세 교정, 그리고 힘을 빼면서 활을 잡고 켜는 법으로 엄청 고생했지만 제게는 너무 즐거운 도전이었습니다. 바이올린 악기를 배울 때마다 모든 잡념을 버리고 다시 어린애가 된 듯이 단계를 매번 넘어가며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남은 여생동안 바이올린을 계속 배운다고 해도 차이코프스키의 그 곡을 연주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그냥 이 곡은 듣기만 해야죠. ^^



앞으로 영문학술지 편집인으로서 개인적으로 바라는 점이 있을까요?

고찬미 사진

제 업무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우리나라에서 인문학 분야 편집인으로 전문(정규) 인력을 쓰는 기관이 아직까지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다른 학술지들은 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편집되고 간신히 발간이 되는 상황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학술지 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인력과 예산에서 전폭 지원을 해주는 본원에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저로서는 전문 편집인이라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저절로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제가 맡고 있는 <The Review of Korean Studies>가 국내·외 등재 저널로 선정되거나 유지되는 성과를 낸 것은 당연한 결과이고요. 앞으로는 이런 양적 지표를 넘어서서, 한국학 연구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독보적 학술지가 되도록 계속해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일례로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이 특히 접근하기 어려운 한국학 1차 자료나 고전 자료의 영역과 같은 관련 학술 정보를 더 많이 담아내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 개인적 바람까지 말하자면 학술 편집인으로서의 전문 역량을 키울 수 있는 풍토가 국내에 마련되는데 어떤 형태로든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일단 제가 모범을 보여야 하겠죠? 어느 대학이나 연구 기관, 그리고 학회에서 학술지를 편집하는 인력이 저희 본원처럼 전문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학술연구 문화를 건전한 성숙의 결과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봅니다. 또 올해 꿈은 아니고 가까운 미래에라도 인문사회과학편집인협의회가 만들어지길 바라고 그 곳에서 제가 하나의 구성원이 되어 열심히,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