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경술국치와 어느 한말 지식인의 삶

박용만 사진
박용만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장

‘저 삐죽하고 여윈 모습 나와 다름없으나/이 한(恨) 굽이 서린 참 난 어디에서 찾을꼬!’


이 짧은 글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건승(李建昇, 1858~1924)이 만주로 건너가기 전 개성에서 홍승헌(洪承憲)을 기다리며 찍은 사진의 뒷면에 직접 써놓은 것이다. 왼편에 국화 화분을 놓고 의자에 앉아 찍은 이 사진 속 53세의 이건승은 마른 외모에 눈에는 꼿꼿한 기상이 서려있다.


이건승 선생 사진

이건승 선생 사진

이건승은 조선의 대표적인 명문가였던 전주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의 후손이었다. 강화학파의 거봉인 이충익이 그의 고조부였으며, 한말 문장가로 유명한 이건창이 그의 친형이었다. 그러한 그가 마치 도망하듯 남의 눈을 피하여 고향을 떠나 만주로 떠난 것은 나라를 빼앗긴 백성으로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화도에 살던 그는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상의 산소에 하직한 다음 9월24일 출발하여 26일 밤 개성에 도착하여 친구인 왕성순의 집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에서 미리 약속한 충북 진천의 홍승헌(洪承憲, 1854~1914년)이 오기를 기다리며 위의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동행하는 홍승헌도 조선 후기 홍양호의 5대손으로, 그 자신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1910년 12월 1일 이들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 청나라 상인의 달구지를 빌려 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만주로 건너갔다. 마차로 600리의 낯선 길을 달려 회인현 흥도촌에 도착하니, 이미 두 달 전 이곳에 도착한 정원하(鄭元夏)가 이들을 맞았다. 정원하 역시 조선양명학의 비조로 추앙되는 정제두의 6대손이었던 인물이었다. 이후 이들의 삶은 그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애초에 무엇을 목적하고 온 것이 아니었기에 뚜렷한 행적을 남기지도 않았다. 사실 60을 바라보는 노인들이 낯선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때로는 모여살다 때로는 헤어진 채 그저 만주의 기후와 풍토병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연명할 뿐이었다. 결국 1914년 8월 풍토병으로 홍승헌이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었던 길을 죽어서야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험난한 여정을 함께 했던 이건승은 시를 지어 절통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떠나올 때 손을 잡고 왔더니 오늘 운구를 돌려보내네./수레는 너무 빨리 지나고 언덕에 내 외침은 막히니/강가에서 홀로 배회할 뿐./내 발길은 이 물에 막혀/멀리서만 바라보니 간장은 끊어질 듯.’


홍승헌의 시신이 고국으로 돌아간 지 10년 뒤인 1924년 이건승은 67세의 나이로, 정원하 역시 다음해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명문가의 후예였고 당대의 명사였지만 경술국치를 경험하면서 한결 같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황현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들처럼 정처 없는 방랑의 길을 나섰으며, 또 정인승은 세상에 알려지기를 두려워하며 산골에 은거하였다. 나라가 망하는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지식인으로서의 비애와 부끄러움이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황현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며 말한 것처럼 지식인의 노릇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세상을 구할 학문을 하였으면서도 그 세상이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한말 지식인들의 심정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곧 자괴감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우리가 굳게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을 속이지 않고[毋自欺]’ ‘스스로 부끄러움[自愧]’이 아니겠는가.


pym1204@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