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근대시기 한국의 표상(表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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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국제교류처 한국바로알리기사업실 선임연구원

‘표상’이란 지각의 대상에 대한 대표적인 상(像)이며, 지각의 여러 요소가 주관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마음 속의 현상으로 사전에서는 정의하지만, 우리는 흔히 한 시대의 표상을 말할 때 그 시대로 대표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근대시기 한국에 대한 표상은 개항을 전후하여 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들은 조선의 자연, 역사, 문화, 민속, 민족성, 기후, 정치 등에 관해 상세한 묘사를 남겼다. 조선을 방문한 목적과 그들이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함으로 인해 동일한 대상인 ‘조선’에 주목하는 요소는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여성 지리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는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에서 서울에 대한 첫인상을 ‘낮은 가옥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중세풍의 더러운 도시’라고 묘사하였으나 이후 ‘세계의 거대한 수도 중의 어느 곳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뜻을 음미하기까지에는 1년의 세월이 필요했다’라고 술회하여 자신의 첫인상이 피상적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관찰자들의 시선으로 한국의 민족성을 언급할 때도 ‘미개, 무기력, 무능’과 같은 묘사가 지배적이던 와중에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에서 인간의 천성은 어디에서나 비슷하게 나타나며, 피상적인 관찰로 판단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에게는 ‘목적성’을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일본은 표상을 의도적으로 형성하고 유포했는데 특히 민족성에 대한 담론은 일본에 의해 부정적으로 형성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문명화된 상태(civility)=유럽의 습관과 풍습’을 전제로 ‘야만’과 ‘문명’에 대한 인종과 민족의 유형을 확정했으며, 이 사상은 일본인들의 한국인식 형성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즉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한 담론은 ‘전근대성, 후진성’이라는 단어로 대표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본인이 이러한 담론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 민본주의자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문명’이라는 기준이 가지는 상대성과 일반화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국민 전체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화’에 접하면 국민전체의 과학적 이해력이라고 하는 것도 스스로 진보된 것으로 보인다. (중략) 일본이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되었을 때, 일본인의 지식도 지극히 낮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일본인의 과학적 지식은 사람과 귀신과의 구별도 안 되는 정도였다. 이것은 모두가 ‘문화’에 접하지 않았던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국민의 심성이 나쁘다거나, 과학적 능력이 국민성으로서 원래 결여되어 있다는 식으로 속단할 수 없다. (중략) 단지 일반적 ‘문화’를 접하지 않은 현재의 조선인이 현저하게 일본인에 열등하다고 해서 그들을 일본인과는 별종의 열등민족과 같이 단정하는 논리는 납득할 수 없다. (吉野作造著·松尾尊兊編 『中国·朝鮮論』、平凡社、1980、p.5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일본은 식민 지배를 위한 정책적 논리의 근거가 되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정치의 무능력’을 강조하게 된다. 한국의 정치 및 사회제도의 불합리성으로 인해 부정적 민족성이 형성되었다는 논리로 한국의 민족성 담론을 형성, 유포하게 된 것이다. 이는 한국사를 수동적, 타율적 성격으로 규정하는 논리와 연계되기도 했다.

이렇듯 ‘근대 한국의 표상’은 근대라는 시기적 특성과 맞물려 한국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외국인들에 의해 피상적인 이미지만 생산, 유통되기도 했고, 제국주의 일본이 의도한 부정적 담론으로도 양산되어 주류 표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표상은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위상을 확립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우리가 아닌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주류 표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피상적이거나 의도된 표상 이외에도 근대를 맞이하는 한국을 담아낸 표상의 스펙트럼은 넓고도 다채로워서 이에 대한 연구도 분야별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연구 성과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표상 연구가 한 단계 진일보하려면 다양한 개별 표상을 밝혀내는 연구뿐만 아니라 표상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추적하여 그 계통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근대 한국의 표상에 대한 계보가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전통’과 ‘근대’가 공존했고 시대적 불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 시대의 다양성에 한 발 더 접근하게 될 것이다.


parksy@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