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새로운 연구 주제 ‘신라해적’ 이해하기

김창겸 사진
김창겸
한국학진흥사업단 부단장

제주도에서는 예멘 난민의 입국과 수용여부가 민감한 문제로 떠올랐다.

인간은 육지를 중심으로 생활한다. 그러나 땅을 연결하는 매개가 물이며, 보다 큰 대륙을 연결하는 것은 바다이다. 인간은 땅과 함께 강과 바다를 이용하여 삶을 영위하며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 왔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바다에 대한 관심을 여러 편의 연구저서와 논문으로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해양사 연구를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고민도 나오고 있다. 그 이유는 최근 ‘공간사’ 연구가 시도되고 있듯이, 인간이 활동했던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한국해양사 연구서들

최근 일본으로 진출한 신라인, 신라해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어 흥미롭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인구이동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특히 신라 하대, 9세기에는 일본 서부 연안에는 극성스러운 신라인들의 출현과 이주가 있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백성들의 유리현상이 만연하였다. 많은 유이민은 황해를 건너 중국 당(唐)의 절강성(浙江省)과 산동반도(山東半島) 등 지역, 특히 남쪽으로는 대마도(對馬島)와 일본의 서부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것은 신라에서 생활의 고통과 질곡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세계를 찾아 나선 생존투쟁이었다.


대재부 건물 복원도

대재부 건물 복원도

더구나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장보고가 죽고, 851년 청해진이 혁파된 뒤에는 해적의 활동과 신라인의 이주현상이 더욱 심해졌다.하지만 일본 서부 해안에 도착한 신라인들이 상륙코자 하면 일본주민들이 활을 쏘아 공격함에 죽음을 당하거나 도망치다가 체포되어 곤욕을 치루었다. 이 과정에서 신라인들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일본인의 공격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어쨌든 신라인은 오랜 항해와 굶주림에 지쳐 매우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에 일본은 신라인의 입국을 금지하거나, 신라와 왕래상 중요한 거점인 대마도에 병력을 배치하고, 또 당과 신라에서 오는 사신과 상선들의 입항과 사무역의 중심지인 대재부(大宰府)의 책임자를 유능한 고위 군관으로 임명하였다. 아울러 잦은 신라인과 해적의 출현으로 침공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에 경계를 한층 강화하면서, 신궁의 신에게 점을 치고, 사찰에 불상을 안치하고 밤낮으로 불경을 읽고 주문을 외우며 국가진호를 기도하였다.


≪일본삼대실록≫ 권14,  26일에 일본은 사천왕상을 나누어 주고 지방 나라들에게 신라 침공을 막아달라고 빌게 하였다는 기록.

≪일본삼대실록≫권14, 26일에
일본은 사천왕상을 나누어 주고
지방 나라들에게 신라 침공을
막아달라고 빌게 하였다는 기록.

그럼에도 869년 5월 22일 신라해적이 일본 지방에서 올리는 공물을 약탈한 경천동지할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곧 신라가 침공할 것이고, 고위 정치인이 신라국왕이 서로 통하여 일본 국가를 해하고자 도모한다는 고변이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일본에 던진 충격은 매우 심각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 나갔다. 대재부의 경계를 굳게 하면서, 현지에 살고 있던 신라인들이 출몰하는 신라인과 내통할 것을 우려하여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켜 집단행동을 방지하고, 또 신라상인들이 일본 상인층 내지 호족층과의 결합을 차단하였다. 반대로 신라군(新羅郡)이란 특별 구역을 편성하여 집단거류지를 만들기도 했다. 이들 중에는 신라의 과학기술을 전수하고 현지를 개척하면서 적응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만족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다.


신라 말기에는 한반도가 후삼국의 전란으로 혼란에 빠짐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진출하였다. 마침내 일본조정은 신라해적토벌군을 편성하여 추포에 나섰다. 894년 9월 5일 신라해적이 45척의 배를 타고 대마도를 습격해 옴에, 9월 17일 대마수(對馬守) 문실선우(文室善友)가 이끄는 군대가 격렬한 전투를 벌려 해적의 대장군 3명과 부장군 11명 등 302명을 죽이고, 해적선 11척, 대도 50자루, 창 1,000자루, 활 110장, 방패 312매 등 각종 무기를 빼앗았으며, 이때 사로잡힌 현춘(賢春)이 본거지에는 배 100척과 승선인원 2,500명 있으며, 대장군 3명 중 1명은 당나라 사람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부상략기≫).  이처럼 신라해적은 오합지졸이 아니라 다양한 무기를 소지하고 지휘체계와 막강한 공격력을 가진 조직적인 전투집단이었다. 이와 같이 극성스러운 신라인의 침입으로 어쩔 수 없이 일본은 대외적으로 당에 사신 파견을 중지하고 말았다.


장보고 선단의 무역선 복원모형

장보고 선단의 무역선 복원모형

사실 해상을 떠도는 신라인의 출현과 이주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매우 심각하여, 국방상 큰 문제로 여기고 대책에 부심하였다.

하지만 성분이 다양하고, 또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와 목적이 차이가 있어, 일괄 신라해적이라고 보는 것은 적합치 않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이들의 실체를 ① 신라의 해적, ② 신라에서 온 해적, ③ 재당신라인, ④ 당 및 신라에서 온 신라인 등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또 신라인이라고 보는 경우라 해도 ① 장보고 암살 이후 탈출한 장보고세력의 일부, ② 신라의 기근으로 해적으로 변한 어부들, ③ 신라왕실의 명령에 따라 식량을 구하러 나선 신라의 정규 군인, ④ 바다로 도망쳐 해적질하는 신라의 범죄자와 반란세력, ⑥ 신라의 지방호족과 연결된 상인, ⑦ 신라유이민 등 여러 견해가 있다.


이처럼 9세기 신라인들의 해외진출 현상은 내적으로는 신라사회의 혼란과 변화를 과속화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신라인의 역량과 능력을 확대 발산한 것이다. 일본으로의 진출은 일본에게는 매우 심각한 현상이면서도 큰 파급효과를 주었다. 특히 이것이 이유가 되어 종전까지 적극적이고 개방적이었던 대외교류 방향이 이후 한동안은 소극적이고 배타적이며 패쇄적인 성격을 띠게 하였다. 결국 신라인의 일본 진출은 동북아지역의 인구이동과 함께 문물의 교류가 이루어져 일본의 역사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작금 지구상 여러 지역의 난민문제와 연계하여 신라해적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kimck@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