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또 다른 부여, 서풍현 서차구 고분군

정미량 사진
오강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

1955년 이른 봄날 요령성 시펑현(西豊縣) 러산향(樂善鄕) 지쫑촌(執中村) 쟝쟈제(姜家街)에 사는 몇 사람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마을 뒷산에 올랐다. 이제 갓 겨울철이 지났고 아직 곡식을 심지도 않은 상태라 집집마다 식량이 충분치 않던 차에, 십여년 전 마을 노인들이 뒷산에서 구덩이를 파다가 우연히 황금과 옥기를 파내어 한 몫 단단히 챙겼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함께 올라간 마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몇 해 전 기이한 물건을 파낸 적도 있었다.

이렇게 의기 투합하여 뒷산에 오른 마을 사람들이 예전에 황금이 나왔다고 하는 지점과 그 부근을 파기 시작하였는데, 과연 허리춤까지 파내려간 한 지점에서 청동칼과 말·매·양 등 동물 문양이 있는 작은 장식품, 황금귀걸이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날 이들은 파낸 물건들을 부근에 있는 고물상 등에 가져가 팔고 그 돈으로 식량과 가재도구 일부를 샀다. 이들이 뒷산에서 황금을 파내 한 몫 잡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쟝쟈제 뿐만 아니라 주변 마을까지 퍼졌다.

이렇게 되자 주변 마을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쟝쟈제 마을 뒷산에서 유물을 파기 시작하였고, 이 소문이 시펑현인민위원회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시펑현인민위원회에서는 주민들이 파낸 물건들이 유물이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유물을 캐내는 일을 중단하라 명령한 뒤, 주민들로부터 회수한 유물 가운데 몇 점을 골라 요령성문화국에 향후 처리 방향을 문의하였다. 그런데 요령성문화국의 담당자가 실수로 오래 전 유물이 아니므로 보존 가치가 없다고 회신하였다.


시차꼬우 고분군의 주요 출토 유물

그림1)시차꼬우 고분군의 주요 출토 유물

그러자 이번에는 쟝쟈제로부터 반경 30km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쟝쟈제 뒷산으로 몰려와 유물을 파기 시작하였는데, 1955년 늦은 봄부터 겨울철까지 많을 때는 하루에 수백 명씩 몰려와 땅을 파 순식간에 수백 기의 고분이 파괴되었다. 그 결과 커다란 광주리 몇 개에 그득 찰 정도의 옥석과 유리제품, 수백 근의 청동기와 철기, 집집마다 한 두 자루 가지고 있을 정도의 칼, 개인마다 한 두 점씩 차고 다닐 정도의 황금귀걸이와 장식품이 도굴되었다.

이러하기를 다음 해인 1956년 5월 중순까지 이어졌는데, 시펑현 국영축목장의 한 지식인이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는 동북박물관에 상황을 알렸고, 동북박물관에서도 도굴된 유물들이 심상치 않은 것이라는 점을 느끼고는 같은 해 5월 29일부터 9월 7일까지 3개월 동안 8,000㎥을 발굴 조사하여 아직 파괴되지 않은 63기의 고분(전체의 5% 가량)과 2,247점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아울러 고분군 범위 내에서 6,264점의 유물을 수습하고, 민가에 흩어져 있던 5,323점의 유물을 회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차꼬우(西岔溝) 고분군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시차꼬우 고분군의 조사 경위는 당시 중국에서도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시차꼬우 고분군의 조사자이자 보고자인 쑨소우따오(孫守道)가 고고학자의 유적 조사 보고치고는 이례적으로 ‘일대 사건’이라는 격렬한 표현과 어조를 쓰면서까지 고분군의 파괴·도굴 경위를 자세하게 밝히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관내의 유적 보존과 조사가 더욱 강화되기에 이른다.

시차꼬우 고분군은 원래 450~500여기의 단순움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분군은 구릉 정상부를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는 중심구역과 그 좌우 가지 능선에 조성되어 있는 동부구역․서부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구역에 가장 많은 고분이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분군의 조성 또한 중심묘구부터 시작하여 점차 가지 능선으로 확장되었다. 동부구역의 맨 끝 지점, 구릉 끄트머리 정상부에는 말머리를 희생물로 삼은 3개의 제의유구가 배치되어 있기도 하다.

파오즈옌유형의 주요 유물

그림2)파오즈옌유형의 주요 유물

시펑현 시차꼬우 고분군 출토 동병철검

그림3)시펑현 시차꼬우 고분군 출토 동병철검

시차꼬우 고분군은 조사 경위부터 시끌벅적하였지만, 고고학계에서 더욱 놀라워한 것은 조사 결과였다. 시차꼬우 고분군에 다량의 동병철검과 철제 무기류 뿐만 아니라 북방 유목-목축문화권에서 널리 유행하였던 각종 북방계 청동패식류와 황금사를 꼬아 만든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요령성과 길림성의 청동기시대 일반적인 석묘가 아닌 북방계 움무덤이나, 이 일대에서는 처음으로 말이빨을 무덤에 껴묻거나 말뼈를 제물로 쓴 제의유구 등도 그러하다.

쑨소우따오는 이와 함께 고분군의 조성 연대가 기원전 2~1세기라는 점을 들어 시차꼬우 고분군이 흉노문화의 지역문화에 속한다고 공표하였다. 그런데 정작 흉노는 기원전 105년(한나라 무제 36년) 한나라의 심각한 공격을 받아 중심지가 서쪽으로 이동된 상태였다. 이 때 흉노좌부의 중심 또한 하북성 화이라이현(懷來縣)에서 내몽고자치구 후허하오터시(呼和浩特市)로 옮겨 갔으므로, 시차꼬우 고분군과 흉노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고분군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제기된 것이 오환문화론이다. 오환문화론은 한나라 무제가 흉노좌부를 격파한 다음 상곡군으로부터 요동군에 이르는 새외 지역에 오환족을 이주시켜 흉노의 움직임을 정찰하게 하였다가, 기원전 78년 요동오환의 반란이 제압된 직후 점차 쇠퇴하였다는 역사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한서』 「흉노전」에 따르면, 도요장군(度遼將軍) 범명우(范明友)는 요하 서쪽이 아닌 요동군에서 요하를 건넌 다음 요동오환을 공격하였다. 따라서 오환문화론 또한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기원전 2~1세기 시차꼬우 고분군을 대표로 하는 물질문화를 남긴 족속은 누구일가?

시차꼬우 고분군에 다량으로 부장되어 있는 동물문 중심의 청동패식은 당시 한나라 북쪽 북방문화권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여러 족속과 정치체에 의해 공유되었던 유물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시차꼬우 고분군의 문화 정체와 족속을 파악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마찬가지로 시차꼬우 고분군에 다량 부장되어 있는 한식 철제장검 등 또한 요동군과의 근접성을 생각할 때, 정치경제적 여건에 따라 얼마든지 능력껏 수용될 수 있는 유물들이다.

이에 반해 시차꼬우 고분군의 핵심 유물 가운데 하나인 동병철검, 황금제 귀걸이, 토기는 한나라는 물론 북방문화권의 다른 지역․문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유물군이다. 그런데 이 세 유물 요소가 모두 확인되는 것이 바로 길림시를 중심으로 제2송화강 유역 등지에 형성되어 있던 부여문화(포자연문화)이다. 동병철검과 황금귀걸이는 완전히 같고, 토기는 부여문화의 핵심 부장 토기 가운데 하나인 포자연형호(泡子沿型壺)와 같은 유형에 속한다.

한수문화권, 시차꼬우유형, 파오즈옌유형 호의 변천 관계

그림4)한수문화권, 시차꼬우유형, 파오즈옌유형 호의 변천 관계

시차꼬우 고분군을 표지로 하는 똥랴오하(東遼河) 중상류역의 시차꼬우유형과 노하심 고분군을 표지로 하는 제2쏭화강 중상류역의 파오즈옌유형을 상징하는 대표 토기는 모두 그 기원이 제1쏭화강과 넌강(嫩江) 유역의 한수문화(漢書文化)에 있는데, 파오즈옌유형에는 제2송화강 유역의 토착적인 요소가 상당히 복합되어 있고, 시차꼬우유형에는 동병철검 외에는 토착적인 요소가 거의 복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차꼬우유형은 기원전 2~1세기에만 존속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시차꼬우유형은 파오즈옌유형과 함께 부여문화의 전기를 구성하고 있던 물질유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수문화권에서 한 갈래는 제2쏭화강 유역으로, 다른 한 갈래는 똥랴오하 유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였는데, 제2쏭화강 유역에 정착한 집단은 토착 집단과 적극적인 융합을 하였을 뿐 아니라 군사 긴장을 완화한 반면, 똥랴오하 중상류역 집단은 정복자적인 입장에서 시종일관 군사 긴장만으로 집단을 유지하다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시차꼬우유형이 부여문화 형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은 연령병식(連鈴柄式) 동병철검(銅柄鐵劍)과 노하심 고분군을 표지로 하여 설정되어 있는 황금제의 노하심형이식(老河深型耳飾) 등이 시차꼬우유형이 소멸된 뒤, 제2쏭화강 유역의 파오즈옌유형으로 유입되어, 이후 부여문화의 핵심적인 유물 요소로 자리잡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시차꼬우유형 집단이 같은 부여문화인 파오즈옌유형에 적극적으로 용해된 것이다.

제2쏭화강 유역의 파오즈옌유형은 시차꼬우유형이 소멸된 직후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제2쏭화강 유역을 넘어 사방으로 확산되어 예맥족이 세운 여러 나라와 정치체 가운데 가장 강대한 국가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비약적인 성장에 시차꼬우유형인들의 보탬도 있었을 것이다. 한 때 흉노족이나 오환족, 그리고 부여와 관계가 없는 다른 족속으로 치부되기도 하였던 시차꼬우 고분군과 유형, 부여문화의 완전한 복원을 위해 다시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okw@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