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의 향기

한글 고문서 한 편으로 들여다 본 지주가의 적선과 탐욕

허원영 사진
허원영
고문서연구실 연구원

고문서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관찬사료가 놓치고 있는 생생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에 거시적인 거대 서사가 아니라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역사의 서술을 위한 자료로 각광 받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고문서는 역사의 한 장면에 대하여 극히 부분적인 내용만을 담은 단편적인 기록이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를 간과한다면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오독하고, 심지어 사실과 전혀 다른 역사상을 제시하는 잘못에 빠질 수도 있다.

다음의 고문서를 보자. 1850년 이병관이란 인물이 한글로 작성하여 지주에게 올린 “수표(手標)”라는 문서이다. 수표는 주로 대차(貸借)나 기탁(寄託), 약속 등의 경우에 주고받는 증서로서 다짐[考音]의 성격을 지니는 문서이다. 이 경우는 작인의 지위에 있는 이병관이 지주가에 지대를 바치겠노라는 약속을 문서로 작성하여 지주에게 건네 준 것이다.

1850년 이병관수표

<1850년 이병관 수표>

미수기(未收記)

무신년(1848)에 거두지 못한 것을 탕감해 주신 덕도 태산 같사온데, 기유년(1849) 7월에 거두지 못한 것이 9접1) 4속이옵고, 경술년(1850)에 거두지 못한 것이 15속이오며, 이에 대한 싹2)의 값이 또한 2접 4속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합하여 값으로 따진 159냥 6전을 8월까지 바치기로 수표를 작성하여 바칩니다. 보리 거두지 못한 것 39말.

8월 12일 수기주(手記主) 이병관(서명)


1) ‘접’은 채소나 과일 등을 100개씩 묶어 세는 단위로, 여기에서는 미역을 세는 단위로 볼 수 있다. 9접4속은 904묶음이다.

2) 여기서 ‘싹’은 미역을 키우기 위한 미역 종묘를 가리킨다.

문서를 보면 이병관이 지주에게 납부하기로 한 지대는 159냥 6전과 보리 39말이다. 이 액수는 당해 연도인 1850년과 1년 전인 1849년의 두 해 분이었다. 그 외에 1848년분 지대도 납부하지 못했으나 지주측에서 탕감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3년분의 지대를 납부하지 않았음에도 지주와 작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과 80여 냥에 달하는 한 해 분의 지대를 탕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주가의 작인에 대한 덕업의 한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그것이 민중의 문자인 한글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소통과 배려의 문자로서의 한글, 그리고 지배층의 애민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그려지는 모습은 은혜를 베푸는 “덕부(德富)”로써의 지주와 그에 감읍하는 작인의 상황이다. 그러나 이병관이 문서를 작성하는 실제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당시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물과 장소, 그리고 그 역사를 살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몇 천 점의 고문서들 틈에서 관련 자료들을 발굴하여 끄집어내야 한다.
<1850년 이병관 수표>를 전래해 온 지주가에는 “이병관”의 이름으로 작성된 문서가 몇 건 더 존재한다. 그것은 모두 1840~50년대 맹골도민들이 진도군수와 암행어사 등에게 올린 청원문서로, 이병관은 이들 맹골도민들의 대표격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청원은 모두 지대 납부를 둘러싼 지주가와의 갈등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맹골도는 우리나라 서남해 최극단에 위치한 섬으로, 죽도, 곽도 등과 더불어 맹골군도를 이루고 있다. 현재도 진도 팽목항에서 여객선을 통하여 육지와 연결되고 있듯, 진도를 통하여 접근할 수 있다. 맹골군도를 따라 흐르는 맹골수도는 울돌목(명량해협) 다음으로 조류가 빠르고 거센 곳으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비극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맹골도는 15세기 경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는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해당 지주가에서 16세기 중후반 무렵 육지의 해택지를 간척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근 도서 사점과 경영이 본격화되었는데, 그 때 맹골도와 관련을 맺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1687년 맹골도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 주기를 요청하는 소지 관에 올린 바 있다. 그러나 지주가의 맹골도 경영은 지속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다. 어느 시점엔가 맹골도는 빈 섬이 되었고,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시기에 완주이씨 및 제주최씨가 다시 입도하여 정착하면서 현재 마을의 기원이 형성되었다. 문제는 이 당시 입도한 사람들은 맹골도가 주인 없는 무인도로 알고 정착하였고, 지주가 역시 상당기간 동안 맹골도에 대한 소유권의 행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주가와의 본격적인 분쟁이 시작되기 전인 1822년, 맹골도 주민들은 진도군수에게 세금의 경감을 요구하는 청원을 한다. 이 청원 문서에는 맹골도의 궁벽한 사정이 기술되고 있으나 지주가와 관련된 어떠한 언급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지주가는 맹골도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40년대 전반에 이병관 등 맹골도 주민과 지주가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다. 지주의 지대 수취에 반발하는 맹골도 주민들과 주민들의 지대거납에 대한 처벌과 징수를 요청하는 지주측의 대립은 진도군수와 암행어사를 대상으로 수차례의 소송전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진도관아에서는 지주측의 손을 들어주고, 이병관 등 맹골도 주민을 잡아와 죄를 다스리고 지대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만들어 진 것이 바로 <1850년 이병관 수표>이다. 이 문서는 지주가에서 베푼 은혜의 결과가 아니라 맹골도의 소유권과 지대를 둘러싼 투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1800년 전후, 무인도에 입도하여 삶의 터전을 일군 백성들에 대하여 관의 무거운 수취가 행해졌다. 그리고 1840년경, 갑자기 지역의 주요 양반지주가에서 맹골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지대의 납부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맹골도의 주민들은 이에 대하여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결국은 관의 판결에 의하여 패배하고 만다. 여기에서 이 문서가 등장한다.
지주가의 마름과 마주한 이병관과 맹골도 주민들. 송쟁의 기간 납부하지 않았던 물건들을 납부하기로 다짐하는 문서를 써 내려간다. 이 문서를 통하여 이병관 등 주민들이 9월까지 납부하게 해 달라는 마지막 요청까지도 8월로 고쳐 적게 하고, 보리 39말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게 하는 지주가의 마름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문서를 써 내려가고 있는 이병관, 그리고 이를 바라보고 있는 주민들의 슬픈 표정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 ~ 1897)는 1879년 간행한 「진보와 빈곤」에서 사회가 눈부시게 진보함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지대가 지주에게 불로소득으로 귀속되는 경향의 강화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불평등이 강화됨으로써 퇴보와 경제 불황이 초래됨을 역설한 바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들 역시 토지의 사유화와 독점의 전개 속에 생산수단인 토지에 대한 권리를 상실해 가는 농민의 존재가 모든 사회문제의 근본임을 통찰하고 있었다. 이후 조선이 망하고, 또 100년도 더 지난 오늘날이지만, 지대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에 못지않게 강력하게 느껴진다. 경제성장과 진보의 발걸음이 더뎌지는 속에서 “지대”라는 블랙홀은 빨아들일 수 있는 모든 사회적 생산의 가치들을 빨아들이는 듯하다. 사람들은 가치를 실현하고 새로운 부를 창출함으로써 삶을 영위하기보다 건물주로서의 삶을 선망하며, “지대 추구(地代追求, rent-seeking)” 행위 또한 당연시되고 있다. 온 사회가 부동산에 몰입하고 있으며, 빚으로 쌓아 올린 부동산의 값어치는 국가 경제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헨리조지는 단일세에 기초한 “토지가치세”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은 한전론(限田論) 등 토지의 사유화에 대한 제한과, 나아가 정전제(井田制)를 비롯한 토지 공개념을 이상적인 제도로 제안하였다. 2017년 한국 사회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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