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조선 문인의 독서와 그 범주

- 봤으면서 안 본 척, 안 봤으면서 본 척

김덕수 사진
김덕수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선임연구원

독서는 식견을 넓히는 데 필수적이다. 시문 학습과 창작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문학, 특히 한시의 경우는 용사(用事)와 점화(點化)라는 기법을 통해 기존의 문학 전통과 성과를 시편 속에 투영했으며, 정치한 독서를 통해 문예 이론과 작법을 습득했다.

전대 시인의 작품을 배울 때, 선집을 읽는 것과 전집을 읽는 것, 최고 비평가의 견해가 실린 주석본 전집을 읽는 것은 천양지차다. 전통시대 사대부의 독서와 그 범주를 살피는 것은 한문학 연구에 긴요한 절차다. 김안로의 「희락당고」는 이 부분에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한다.

간신의 대명사 김안로는 중종조를 대표하는 훈구파 문인이다. 부친 김흔이 구축한 문한가적 전통을 흡수하여 사마 양시에 합격했고 부친과 숙부를 이어 문과에 장원했으며 사가독서에 누차 피선되었다. 문형으로서 사대교린의 문장을 주관했고 응제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성취는 ‘정유삼흉’이라는 정치적 평가에 철저히 가려졌으며 문집도 후손가에 비장된 채 공개되지 못했다.

고서위의 붓이 있는 사진

「희락당고」에는 600수를 상회하는 한시가 실려 있고, 여기에는 김안로가 직접 작성한 주석이 빼곡히 적혀 있다. 출전과 시법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본인 시편 전체에 본인이 손수 주석을 가한 사례는 김안로가 유일하다. 문예적 자부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주석 찬자가 문단의 핵심 인물이거니와 자기 작품에 직접 쓴 주석이므로 와전과 왜곡의 혐의가 적다.

주석 문면에 노출된 정보를 통해 김안로가 학습하고 참조했던 서적을 유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수백 종의 서명뿐만 아니라 무수한 저자명, 작품명, 고사 등을 각 시구의 출전으로 제시했고, 시구 하나에 두세 개의 전고가 달린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일단 엄청난 분량의 독서 범주에 주눅이 든다.

김안로가 주석에서 인용한 시문 가운데 한정된 문헌에만 수록된 것을 추적하고, 참조 문헌의 오류까지 그대로 답습하거나 혹은 통사구조와 그 내용까지 완전히 일치하는 주석을 비교·검토해 보았다. 김안로가 주석 과정에서 활용한 책은 성종 연간에 반사된 「사문유취」와「운부군옥」이었다. 유서(類書)와 운서(韻書)를 활용하여 용사의 출처를 매거했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애초에 시를 짓는 단계부터 소재별, 주제별 검색이 가능한 유서와 운서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다. 시료(詩料)를 물색할 때 유서와 운서의 결정적 도움을 받았으나 김안로는 두 책의 서명을 슬며시 감춘 채 그 내용만 인용했다. 마치 인용된 문헌을 모두 읽은 것처럼.

김안로의 작시는 강서시파(江西詩派)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여기에는 부친 김흔의 학시 궤적 및 당시 김안로 가문에 소장된 전적의 영향이 적잖이 작용했다. 유서와 운서를 추론했던 위 방법론을 여타 전적에 적용해보니 다양한 판본의 두시 주석서, 송대 주석본 강서시파 시집, 방회(方回)의「영규율수」 등이 김안로 장서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학식과 용사를 중시하는 송시, 특히 강서시가 중종 연간에 조선에서 만개할 수 있는 문헌학적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도서의 간행과 유포가 한시사를 움직인 전형적 사례다.

고문헌을 검토해보면 일종의 현학적 허세 때문에 기존 입론을 인용하면서도 그 출전을 명시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작금의 연구자들이 엉뚱한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이전부터 존재했던 기성 논의를 조선 문인의 독자적 학설인 양 결론짓는 것이다. 한문학 연구에 있어 텍스트 비평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전통시대에 지식의 전달과 학습은 서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한시사를 설명할 때도 가능한 한 문헌학적 접근이 수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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