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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의리의 상징 오달제, 그의 동전 정책에 대한 의리 주장 정수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1392년 7월 16일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건국된 조선(이 국호는 1393년에 명의 승인에 의하여 채택)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전 왕조인 고려의 제도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본격적인 제도 개혁은 이후 태종, 세종, 성종 대를 거치면서 완성되어 간다. 따라서 조선초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는 고문서 1점을 들어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현존하는 조선 최고(最古)의 임명문서는 1393년(태조2) 10월 일에 도응(都膺)을 전의소감(典醫少監)에 임명하는 문서이다.(도판 참조) 최근 뉴스는 부모 자식 간에 혹은 이웃사촌사이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온갖 섬뜩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당연히 지켜야 될 도리인 ‘의리’에 긴장의 끈을 놓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잠깐, 지금 이야기 하려는 의리는 느와르(Noir) 영화에 등장하는 어둠의 조폭들 사이의 그것은 물론 아니다. 어찌 되었든, 그 의리의 뜻도 시대에 따라 조금은 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러면 조선시대의 대표 의리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시대, 특히 조선후기 선비들이 생각하는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 바로 병자호란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끝가지 의리를 지킨 사람들을 ‘삼학사(三學士)’라는 상징으로 호칭하면서 존경했다. 삼학사는 전쟁이 끝난 후 청나라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세 명의 열사(烈士)로 홍익한(1586~1637), 윤집(1606~1637) 그리고 오달제(1609~1637)이다. 오달제가 지키고자 한 의리는 그럼 무엇이었을까? 그가 죽음을 앞두고 읊었다는 시에 압축되어 있다. [사진]남한산성 현절사: 삼학사의 충절을 기념하여 이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건립한 사당 오달제가 생각하는 인간의 도리는 곧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 즉 충효(忠孝)였다. 조선시대 가장 일반적인 의리였다. 하지만 후세의 사람들이 더 깊이 그를 열사로 추앙한 것은 끝내 청나라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그 의리에 있었다. 그것은 오달제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 그 명나라의 원수에 해당하는 ‘청나라에 굴복 할 수 없다’라고 하는 충효가 뒤 섞인 그런 의리를 죽음으로 지켰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한 삼학사는 조선후기 300년 동안, 그리고 최근까지도 조선 의리의 아이콘이었다. 오달제는 뼛속까지 의리를 간직한 ‘뼈의리맨’이었다. 그는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념적인 열사로서의 의리뿐만 아니라 국가 정책에 있어서도 일관되게 의리를 강조한 그런 ‘의리맨’ 이었다. 그가 25세의 젊은 시절 과거시험장에 제출한 도발적인 답안지에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633년(인조 11) 과거에 앞서 인조와 국정 실무자들은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자 전례가 없던 동전을 주조하여 유통하고자 했다. 보다 참신한 의견을 듣기 위해 ‘어떻게 하면 동전을 잘 유통시킬 수 있겠는가?’를 과거문제로 채택한 것이다. 인조는 응시생들이게 “젊은 인재인 그대들에게는 시대를 구할 계책이 있을 것이니 남김없이 써서 제출 하여라, 내가 친히 살펴보겠노라.”라고 하여 각자의 의견을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해 오달제는 정책의 실무 방향과 더불어 그 본연의 의리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서 답안지를 제출하게 되었다. [사진] 오달제의 문집 「충렬공유고」에 수록된 과거 답안지 동전 사용의 법을 만들어 장차 세상에 시행하려는 것이 임금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입니까? 나라에 이롭게 하려는 것입니까? 민심이 이롭게 여긴다면  동전 유통의 법은 시행될 것이고, 민심이 고통스럽게 여기면 이 법은 성공하기 못하고 폐기될 것입니다. 저는 동전을 유통하도록 하는 정책의 성패는 반드시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간생략) 동전 유통 정책은 담당 관리를 잘 뽑아 특별히 책임을 지우는데 있을 뿐인데 어찌 전하께서 직접 세세한 일에까지 신경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 건데 전하께서는 어짊과 의리로서 근본을 삼으시고 재화와 이로움이라는 것은 말단으로 삼으소서! (오달제의 과거 답안지 중) 그는 동전을 유통하고자 하는 것이 혹 임금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은 아닌지 되물었다. 그러면서 정책적 의리는 바로 백성들에게 이로운지 여부를 먼저 생각하는데 있다고 도도하게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 핵심에는 임금이 항상 마음속에 떳떳한 마음, 즉 사욕이 아니라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고자 하는 의리를 간직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리를 고수하여 적절한 관료를 뽑는 것이 임금이 신경써야할 사소한 정책적 방향이며, 그보다 더욱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국왕이 마음속의 의리를 굳건히 지키는 데 있다고 고언(苦言)하며 ‘마무으리’ 하였다. 오달제가 과거답안지에 동전유통 정책에 있어 임금의 의리를 쓴 것은 그의 나이 25세 때였고, 의리를 지키다가 청나라가 볼모로 잡혀가 심양에서 목숨을 버린 때가 29세였다. 그는 임금에게 조차 의리를 강조하고 몸소 의리를 실천한 ‘의리 그 자체’였다. 오늘날에 있어 그의 의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백성의 관점에서 고민된 정책적 정당성으로서의 ‘의리’일 것이다. 아무리 의리의 의미가 변했다고 하더라도 21세기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오늘날에도 경청해야할 울림이 아닐까 한 번 쯤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그림 속의 아이는 무거워 보이는 무언가를 들고 있다. 아마도 책이 아닌가싶다. 책 위쪽의 이상한 형태는 무어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낙서를 남긴 이 목록집은 아버지 부왕이 내린 책과 서화의 기록이므로 책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책을 기록한 책 속에 그린 ‘책 그림’인 셈이다. 잠재된 무의식에서 나온 장면일 수 있다. 도 4-1. 도 4의 세부
도 4-2. 도 4의 세부 효장세자의 그림은 지금 이 시대의 아이들 그림과 비교해도 예사롭지 않다. 지우거나 고칠 수 없는 필묵으로 거침없이 그려낸 감각적인 필치가 돋보인다. 부왕인 영조도 어린 시절 누구보다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영조대왕행장』의 한 구절을 보자. “무릇 글씨와 그림은 다 배우지 않고도 잘 하시어 필묵을 가지고 노실 때마다 빼어난 풍채가 사람들의 눈을 감동시켰다.” 효장세자도 영조의 이러한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하다. 효장의 이복동생인 사도세자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다. 두 점의 낙서에는 닮고 싶고, 뛰어 놀고 싶은 어린 세자의 무의식 세계가 담겼다. 또한 책을 가까이 하려는 세자의 또 다른 모습도 투영된 듯하다. 10살짜리 아들을 떠나보낸 영조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듯 상심이 컸다. 훗날 세자의 유품으로 돌아온 이 책을 쓰다듬던 영조는 이 낙서를 마주하며 못 다한 부정(父情)을 달래야 했을 것이다. 영조는 『일한재소재책치부』에 남긴 효장세자의 낙서 두 점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소중한 애장품으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영조가 이 목록집에 기록한 실물들은 대부분 흩어져 그 행방을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온전히 남은 것은 효장세자의 이 낙서 그림 두 점뿐이다. 외로운 신하는 의리가 바르니 부끄럽지가 않으며,

임금님의 깊으신 은혜에 죽음은 또한 가벼워라.
이번의 삶에서 가장 슬픈 사실이 하나 있다면,
홀로 계신 어머니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리라.

<오달제가 심양에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읊은 시> ※ 현절사 이미지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현절사’항목에 있는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