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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義烈)이란 시호를 받은 영빈이씨 원창애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가물고 무더운데 몸과 마음이 평안하신지 살피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우러러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외손은 다리 붓는 증세가 조금 나아서 다행입니다. 그러나 모레가 멀지 않으니, 망극한 마음을 진실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하 생략)” 이것은 1772년(영조 48) 5월 19일 왕세손 산(祘)이 외조부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의 첫 부분이다. 왕세손이 언급한 모레는 5월 21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일이었다. 사도세자는 조선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세자였다. 그는 1735년(영조 11) 1월 21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 영빈이씨는 딸 5명을 연이어 난 후에 사도세자를 낳았다. 자손이 귀한 왕실에서 더구나 효장세자가 사망한지 7년 만에 왕자가 태어나자,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였다.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그날 바로 ‘원자(元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원자가 세 살이 되자 왕세자로 책봉할 정도였다. 영조는 아들이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왕재로서의 자질을 키우기 위한 학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나친 열의는 아들을 병들게 하였다. 1762년(영조 38) 영조는 왕세자의 행각을 알고 어떻게 처분할지 고심하였다. 이때 영조가 결단을 내리도록 극언을 한 사람은 사도세자의 모친 영빈이씨였다. 아들의 병을 상세히 알고 있었던 영빈이씨는 갈등하였다. 그녀는 아들의 발작이 심해져 부왕의 목숨을 해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아들의 상태를 영조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녀의 갈등하는 마음은 ‘폐세자 반교문’에 나타나 있다. 영빈이씨는 하늘이 영조 편인지 사도세자 편인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극심한 가뭄으로 시행한 영조의 기우제에 하늘이 응답한다면, 하늘이 영조의 편이니 아들에 포기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이것은 영빈이씨의 마음이 영조와 아들 사이에서 매우 혼란스러웠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영조가 기우제를 지낸 후에 비가 내렸다. 마침내 영빈이씨는 영조를 찾아가 아들의 모든 행각과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단안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영빈이씨는 자신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자책하면서 사도세자의 3년 상을 마치고는 곧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어미로써 자식을 포기하기 어려운데, 사사로운 모정에 얽매이지 않고 용기를 낸 영빈이씨에게 의로운 일을 한 열녀라는 의미로 “의열(義烈)”이란 시호를 내렸고, 그녀의 묘를 ‘의열묘’라 칭하였다. 영빈이씨는 아들이 병이 깊어져 혹시 더 큰 불행이 왕실에 미칠까 두려워서 어머니로서 내리기 어려운 결정을 하였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영빈이씨의 결단은 왕실을 보존한 슬기로운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영빈이씨는 자신에게 내려진 ‘의열’이란 시호를 기쁘게 받았을까? 가정의 달 5월을 보내면서 영조의 지나친 사랑이 가져온 왕실의 비극적 결말을 되새겨 본다. [사진] 영빈이씨에게 ‘의열’이란 시호를 추증한 교지 [사진] 세손이 외조부에게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