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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1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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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발기로 보는 조선 왕실의 혼례 문화 [사진] 김봉좌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 예나 지금이나 혼례 절차들은 복잡하며 혼례에 따르는 각종 물품들을 마련하는 일로 분주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간소하게 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관행에 따라 어느 정도 규모를 맞추기 마련이다. 가장 무난하게 치러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혹은 혼례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무리를 하면서까지 최대한 화려하게 준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조선 왕실의 혼례는 어떠했을까? 왕세자가 훗날 왕후가 될 왕세자빈을 맞이하는 혼례 즉 가례는 그 어떤 왕실 의례보다 중요한 행사였다. 그러므로 가례도감(嘉禮都監)을 별도로 설치하여 그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고, 등록(謄錄)이나 의궤(儀軌)로 해당 의례와 관련된 전반적인 기록들을 정돈함으로써 훗날의 참고 자료로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편집된 모든 기록물들이 그러하듯 등록이나 의궤에 수록될 수 없는 기록들이 있다. 가례를 위하여 준비한 물품들의 종류 및 수량, 해당 물품들을 마련하고 관리하는 내인(內人)이나 내관(內官)들의 명단 등이 그러하다. 장서각 소장 ‘왕실 발기(件記)’에는 등록이나 의궤에서 확인할 수 없는 각종 의례에서 소용된 물품 등을 비롯하여 여기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명단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발기는 옛한글로 ‘ᄇᆞᆯ긔’, 한자로는 ‘件記’라고 쓰는데, 수량 단위 명사인 ‘벌[件]’에서 파생한 명칭이다. 그 명칭에서도 드러나듯 각종 물품 등의 내역을 하나하나 열거하여 쓰는 목록형 자료이다. 왕실 발기는 겉모양만 보더라도 알록달록한 색상의 두껍고 큰 종이를 여러 장 이어 붙여서 최대 20m까지 이를 정도로 그 기록 내용이 방대한 것이 특징이다. 왕실 발기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부분이 1882년(고종 19) 2월에 거행한 왕세자 이척(李坧: 純宗, 1874~1926)의 가례와 관련된 것이다. 이척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 사이에서 태어나 곧바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82년에 민태호의 여식 민씨[純明孝皇后, 1872~1904]를 왕세자빈으로 맞았다. 훗날 순종은 왕세자빈 민씨를 여의고 1904년에 황태자의 신분으로 가례를 거행하기도 했으나, 첫 번째 가례와 달리 황후와 태후가 모두 별세한 뒤라 왕실 발기에 보이는 규모는 비교적 소략하다. ▲ 1882년 왕세자 가례 당시 왕세자빈에게 하사한 의대를 기록한 발기 1882년 2월의 왕세자 가례를 위하여 1월 15일부터 세 차례에 걸친 간택이 이루어졌는데, 간택에 참여하는 처자들을 비롯하여 그들을 살펴보는 대왕대비 등을 위한 상차림 내역, 간택에 참여한 처자들에게 시상하는 옷감 내역, 간택된 왕세자빈에게 하사하는 의대 내역, 삼간택에 참여한 내인들의 명단과 시상 내역 등이 왕실 발기로 남아 있다. 1월 26일 삼간택을 통하여 왕세자빈으로 간택된 민씨는 안국동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이 때 별궁 및 세자궁에 기명, 이부자리 등 각종 물품들이 배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세자빈을 위해서는 각종 의대와 장신구들을 하사하였다. 각각의 종류 및 수량 등은 왕실 발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본격적인 가례 절차는 2월 3일 납채(納采), 7일 납징(納徵)으로 시작하여 19일에 별궁의 민씨에게 교서(敎書)․죽책(竹冊)․옥인(玉印)․명의대(命衣襨)를 하사하는 책빈례(冊嬪禮)를 통하여 왕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왕세자가 21일에 왕세자빈을 궐내로 모시고 오는 친영례(親迎禮)와 술잔을 나누는 동뢰연(同牢宴)을 연이어 거행함으로써 끝마친다. 이튿날 22일에는 왕세자빈의 책봉을 알리는 교서를 반포하고, 왕세자빈이 대전과 중궁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께 인사하는 조현례(朝見禮)와 종묘 및 경모궁에 배알하는 묘현례(廟見禮)를 거행하였다. 이 때 왕세자와 왕세자빈 곁을 모셨던 내인 및 내관들의 명단 등이 왕실 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역시 등록이나 의궤에는 수록되지 않은 내용이다. 이처럼 왕실 발기에는 기존의 관찬 사료에서 보기 힘든 내용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왕실의 내밀한 삶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