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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7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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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인, 만덕의 나눔 실천 [사진] 김덕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세계기록유산, '승정원일기'. 이 책의 정조 20년(1796) 11월 28일조에 만덕전(萬德傳)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별다른 배경 설명 없이 생뚱맞게 수록되어 있어 기사의 성격과 내용을 파악하기가 다소 애매하다. 이 글은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시행한 월과(月課)에서 죽파(竹坡) 서준보(徐俊輔, 1770∼1856)가 작성한 답안이다. 1790년(정조 14) 약관의 나이에 진사시에 장원한 서준보는 1794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의 탁월한 문장력은 당시 영의정이던 홍락성(洪樂性)의 눈에 띄어 급제하자마자 초계문신으로 선발되는 영예를 누렸다. 연소한 문신 중에서 재능이 출중한 자를 엄선하여 문장력과 학문적 소양을 심화시킨 것이 바로 정조 연간의 초계문신 제도가 아니던가! 초계문신에 선발되는 것은 이전 시대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비견될 만큼 개인으로서 커다란 영광이었고, 국왕 정조 역시 친강(親講)과 친시(親試)를 매달 설행함으로써 이들을 꾸준히 독려하였다. [사진] '승정원일기' 1796년 11월 28일조에 수록된 徐俊輔의 만덕전 부분. 초계문신 서준보는 만덕전을 통해 제주 여인 만덕(萬德)의 삶을 조망했고, 정조로부터 ‘삼상(三上)’이라는 좋은 성적을 받았다. 만덕이란 여인은 누구인가? 근래 들어 전통시대 대표적 여인상을 소개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만덕이다. 정조 연간에 유례없는 기근이 연거푸 제주도를 엄습했다. 세 고을에서 무려 6백여 명이 아사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조정에서 구휼미를 긴급히 지원했으나 구휼미를 실은 배가 풍랑에 침몰하는 불상사까지 겹쳤다. 이때 만덕은 전 재산을 쾌척하여 굶주림에 허덕이는 제주도 백성을 구했다. 제주목사(濟州牧使) 유사모(柳師模)가 장계를 올려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자, 만덕의 선행에 크게 감동한 정조는 그녀에게 소원을 물었다. 만덕은 한사코 거절하다가 끝내 한양과 금강산 구경이라고 대답했다. 제주 여성은 육지을 밟을 수 없다는 국법이 엄연히 존재했으나, 정조는 만덕의 바람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또한 그녀에게 의녀 직함을 주어 대궐에서 직접 만나, “네가 여자의 몸으로 의로운 기개를 내어 수많은 기민을 구제했다니 기특하구나.”라 말하며 후한 상을 내렸다. 당시 쉰여덟 살이던 만덕은 기구한 삶 속에서 인생역전을 이룬 여인이었다.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하여 친척 집에서 연명하다가 끝내 기녀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훗날 제주목사에게 탄원하여 양인이 된 뒤 특산물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박복한 운명을 짊어진 채 세상의 멸시를 한 몸에 받던 일개 여인이 억척스럽게 쌓은 재화를 기꺼이 사회에 환원했고, 이에 국왕 정조뿐만 아니라 번암 채제공, 다산 정약용, 금대 이가환, 초정 박제가, 추사 김정희 등 조정의 시종신과 수많은 시인묵객들도 그녀의 거룩한 뜻을 기린 것이다. 그리고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치르는 월과에 만덕의 삶이 제술 문제로 출제되기까지 하였다. 미천한 제주 여인의 전기가 시험문제로 출제한 것은 참으로 파격적이다. 그것은 전통시대 남성의 잣대로 보더라도 그녀의 행위가 모범적이기 때문이다. 아흔아홉 마지기의 논을 가지고도 남의 한 마지기 땅에 눈독드리는 게 인간의 탐욕이요, 이기심이다. 만덕의 나눔 실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서준보는 만덕전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재물을 모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건 남자도 하기 어려운 일이고, 공을 세우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건 사대부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만덕은 섬에 사는 일개 여인으로서 여종이라는 비천한 신분을 벗어난 적이 없으면서도 이 일을 해냈으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積而能散, 男子之所難能, 功而辭賞, 士夫之所難辦也. 萬德以島中之一女子, 身不離婢使之賤而乃能之, 豈不偉也哉!) 작금에 걸쳐 양극화 현상이 사회문제로 불거지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 말은 사회적으로 많은 혜택을 누리는 기득권층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즉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를 지칭한다. 초기 로마 사회는 고위층의 공공봉사와 기부·헌납 등의 전통이 강했다. 지위가 고귀한 만큼 그 행동도 고귀해야 한다는 것이 로마 귀족의 불문율이었다. 이러한 특권층의 솔선수범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군림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 컨설팅 업체가 전 세계 최고경영자를 대상으로 ‘반(反) 기업 정서’[기업인에 대한 자국 국민의 부정적 인식도]를 조사했는데 우리나라가 70%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는 여타 선진국에 비해 2∼3배나 높은 수치다. 더 이상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란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사회적 책무는커녕 특권 의식을 버젓이 행사함으로써 사회적 양극화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이런 점에서 제주 여인 만덕이 몸소 실천했던 나눔의 미학은 적잖은 울림으로 나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