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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4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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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고달픈 '내 집 마련' 정수환 (국학자료연구실 선임연구원) 21세기 들어 세계 경제는 주택시장 정책에 대한 성공과 실패에 따라 출렁였고, 우리나라도 이른바 주택경기가 중요한 경제 정책의 하나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여기에는 인간 생활을 위해 필요한 주택에 대한 소유 욕구가 자본주의 경제논리와 결합된데 따른 결과이다. 그리고 우리 서민들은 여전히 그 틀 속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통시대, 특히 조선시대의 내 집 마련은 어떠했을까? 여기 한 실학자의 일기가 있다. 이재 황윤석(1729~1791)은 8세부터 일기쓰기를 시작해 54년의 기록을 󰡔이재난고󰡕로 남겼다. 일기에는 18세기 중엽 한양 주택시장의 깨알같은 정보를 담고 있다. 황윤석은 1769년(영조 45) 41세에 종부시-왕실의 족보를 관리하는 관청-의 직장(종 7품)으로 승진하게 되자 고향 전북 흥덕을 떠나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양에 올라와서는 예전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인연이 있었던 학교 인근 하숙집(泮主人宅)에 잠시 머물면서 지방의 가족과 함께할 보금자리를 계획했다. [그림 ] 황윤석이 일생동안 기록한 <<이재난고>>가 상자로 한 상자이다. *필자 촬영 집을 마련하기 위한 예산으로 30냥~40냥 정도를 예상하고 하숙집 주인을 통해 서울의 시세를 탐문하고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가 고향을 떠날 때 논을 팔아서 마련한 40냥이 주택 구입을 위한 자금이 되었다. 기대는 나름 소박했다. 방 2개에 마루가 딸린 집으로 자신의 말을 위한 마구간 정도가 갖추어진 중소형 주택이었다. 물론 출·퇴근이 편한 4대문 안, 직장 인근이어야 했다. 근무지 종부시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경복궁 서편(宗簿寺邊)에 있는 방 2개와 마루, 부엌, 그리고 마구간을 갖춘 5칸 규모의 집이 물망에 올랐다. 가격은 40냥으로 기대가 되었지만 직접 확인한 결과 집의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흥미를 끄는 집은 역시나 가격이 높았다. 중구 청계천변 산림동의 방 3, 행랑, 마구간, 그리고 정원까지 갖춘 12칸 집은 70냥이나 되었다. 크게 실망한 황윤석은 중구 을지로동(仁城府峴)에 있는 7칸 집과 종로구 안국동(小安東防)의 5칸 집을 수소문 했지만 가격이 50냥으로 그의 예산을 벗어났다. 할 수 없이 전세(貰)를 생각했지만, 어렵게 알아낸 전세물건인 11칸 규모의 110냥짜리 집에 대한 1년 전세가가 60냥으로 이 또한 너무 비쌌다. [그림 2] 한양도성도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황윤석의 직장 종부시가 있었던 한양의 모습 10여 곳에 이르는 한양의 주택을 물색했지만 예산과 기호를 충족시켜주는 물건은 만나지 못했다. 낙담한 마음에 나중에 참고하기 위해 기록을 남겼다.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초가집은 한 칸에 10냥이고 기와집은 20냥 정도가 서울의 평균 집값이라고 기록했다. 물론 위치와 상태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지만 대략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이들 집값은 대략 얼마였을까? 일기에 의하면 당시 한양에서 혼자 생활하던 황윤석의 한 달 식비는 1냥 남짓이었는데, 여기에는 한 끼에 5푼씩 하루 2끼로 계산되었다. 도정하지 않은 쌀 1말, 약 8키로가 또한 1냥이었다. 그리고 타고 다닐 수 있는 보통 수준의 말-굳이 비교하자만 준중형 세단 정도-이 40냥 정도였다. 이렇게 복잡해서는 정확한 오늘 날의 값을 알 기 어렵다. 굳이 참고하자면 7급 공무원 황윤석의 1년 연봉이 대략 58냥이었다는 사실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림 3] 황윤석의 꼼꼼한 기록 정신을 보여주는 일기의 본문 부분. 한양의 다운타운에서 그럭저럭 살만한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0냥은 있어야 했다. 시골의 땅을 팔고, 서울에서 봉급을 받아도 이런 저런 생활비를 염두에 둔다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사실 생활비도 고향으로부터 많이 받아 써야 했고, 대출이 거의 불가능했던 그에게는 많이 비쌌다는 결론이다. 결국 황윤석은 ‘내 집 마련’의 꿈을 포기하고 하숙생으로 지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라는 거창한 말은 아니더라도 집에 대한 욕구에 따라 시장이 있었고, 18세기중엽에도 현실적으로 내 집 마련은 멀고도 험한 꿈이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