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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3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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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태봉도(胎封圖)의 비밀 [사진] 윤진영 (국학자료연구실 책임연구원) 여기 한 장의 도면이 있다. 필자가 장서각의 도상자료를 조사하던 중 마주하게 된 왕실고문서 가운데 하나다. 얼핏 보기에 명당의 형세를 그린 산도(山圖) 같기도 하고, 마치 보물을 숨겨놓은 지도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한다. 도면 안에 적힌 글씨를 보면, 이 그림은 창덕궁 후원(後園)의 지형을 그린 것으로 확인된다. 연경당(演慶堂), 능허정(凌虛亭), 옥류천(玉流川) 등의 표기가 그 단서다. 자세히 보면, 능선 자락에 ‘○○ 胎封’이라 쓰고 동그라미로 표시한 곳이 세 군데 보인다. 창덕궁에 있던 태봉의 위치를 표시한 도면임을 알게 된다.  도1 . 창덕국 태봉 위치도, 1929년, 장서각 태봉은 왕실에서 태어난 아이의 태(胎)를 묻은 곳을 말하며, 태실이라고도 했다. 조선왕실에서는 자녀의 태가 국운(國運)과 연관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태를 정결히 하여 전국의 길지(吉地)를 골라서 묻었다. 그런데 이 도면에 태를 묻은 곳은 명산의 길지가 아닌 궁궐 안이다. 무슨 이유일까? 그리고 여기에 묻힌 태의 주인공은 누구며, 이 도면은 왜 만들었던 것일까? 먼저 도면 속 태봉의 주인공을 찾았다. 도면의 왼편에 적힌 ‘정유 태봉(丁酉 胎封)’은 정유년인 1897년생 영왕(英王)의 태실이고, ‘임자태봉(壬子胎封)’은 1912년생 덕혜옹주(德惠翁主), ‘갑인태봉(甲寅胎封)’은 1914년생 고종의 제8왕자의 태실이 된다.  왕실 자녀의 태봉은 풍수에 밝은 지관(地官)이 전국을 누비며 물색했다. 그리고 태실을 만들 때는 수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왕실의 자녀가 태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이를 병폐로 여긴 영조대왕이 1765년(영조 41)에 혁신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세자를 제외한 모든 왕실 자녀의 태를 궁궐의 어원(御苑)에 묻도록 한 것이다. 태어나는 자녀들마다 산자락을 하나씩 차지하게 하여 태실을 둔다는 것은 인력과 물력의 과도한 낭비라고 생각했다. 영조의 결단은 단호하게 실행되었고, 이후로도 지켜야 할 선례가 되었다. 도면에서 보듯 고종황제 자녀들의 태봉이 창덕궁에 있는 것은 영조 대에 단행된 전통을 따른 것이다. 왕실 자녀의 태봉은 풍수에 밝은 지관(地官)이 전국을 누비며 물색했다. 그리고 태실을 만들 때는 수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왕실의 자녀가 태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이를 병폐로 여긴 영조대왕이 1765년(영조 41)에 혁신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세자를 제외한 모든 왕실 자녀의 태를 궁궐의 어원(御苑)에 묻도록 한 것이다. 태어나는 자녀들마다 산자락을 하나씩 차지하게 하여 태실을 둔다는 것은 인력과 물력의 과도한 낭비라고 생각했다. 영조의 결단은 단호하게 실행되었고, 이후로도 지켜야 할 선례가 되었다. 도면에서 보듯 고종황제 자녀들의 태봉이 창덕궁에 있는 것은 영조 대에 단행된 전통을 따른 것이다. 도 2. 서삼릉 전경(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소재), 1929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이왕직(李王職)에서는 전국의 태실에서 빼내 온 왕과 왕실 자녀들의 태항아리 및 지석을 이곳에 묻어 서삼릉태실을 조성했다. 그런데, 이 도면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놀라운 사실이 그 이면에 숨겨져 있다. 1929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산재한 왕실 자녀들의 태실을 지금의 파주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는 일을 추진했다. 태실 안에 있던 태를 담은 항아리와 지석(誌石)을 빼내어 옮겨 묻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전국의 태실을 안전하게 통합 관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한 속셈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궁궐에 있던 태봉까지도 예외 없이 찾아내어 서삼릉으로 옮겼다. 이 도면은 1929년, 궁궐 안에 있던 세 곳의 태봉을 봉출해 간 자리를 그린 것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장서각의 필사본 도서인 『태봉 胎封』에 상세한 기록이 있어 그 실상을 알게 된다.  창덕궁에 위치가 확인된 것은 영왕과 덕혜옹주, 고종 제8남의 태실 등 세 곳뿐이다. 현재 세 분의 태실은 서삼릉으로 가있지만, 태항아리는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했지만, 태실은 왕조의 번창과 생명 존중의 뜻이 담긴 조선왕실의 주요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창덕궁의 태봉이 있던 자리에 작은 표석 하나 세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도 3. 동궐도, 견본채색, 584×273㎝, 고려대 박물관 도 1 에 그려진 공간을 동궐도에 표시하면 붉은색 원이 있는 지점임.  창덕궁의 후원( 後園) 이자 일제강점기 때 비원( 秘苑) 으로 불린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