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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2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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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년간의 오해 – 기록의 진실 혹은 거짓 심영환(장서각연구실 책임연구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정운관첩』(停雲館帖, C3-138)이라는 법첩(法帖)이 소장되어 있다. 이 법첩은 명(明)대의 저명한 서예가인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이 가정(嘉靖) 39년(1560) 정월에 장주(長洲)의 정운관(停雲館)에서 돌에 새겨 찍어낸 것이다. 모두 12권 12책으로 중국 동진(東晋)부터 명대(明代)까지 이름난 서예가의 글씨를 수록하고 있다. 법첩이란 말 그대로 모범으로 삼을만한 글씨를 후대에 다시 찍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운관첩』의 권4 「당인진적」(唐人眞蹟)에는 임관문서(任官文書)가 1점 들어 있다. 곧 당(唐)의 제10대 황제 덕종(德宗) 건중(建中) 3년(783)에 주거천(朱巨川)을 수중서사인(守中書舍人)에 임명하는 고신(告身)이다. 고신이란 당나라에 관리를 임명하는 문서를 말한다. 그런데 주거천의 임관문서가 왜 『정운관첩』이라는 법첩에 실리게 되었을까? 문제의 발단은 주거천의 고신 뒤에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발문(跋文)이었다. 사진1. 주거천고신 1면 ①당(唐)의 고신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의 손에서 많이 나왔으니, 또한 한 시대 문물의 융성함을 볼 수 있다. 하물며 노공(魯公)의 도의(道義)와 풍절(風節)은 백세의 사표가 되니, 그가 쓴 글씨는 더욱 보배롭다고 할 만하다. 지대(至大) 신해년(1311) 2월 22일에 고부(古涪) 등문원(鄧文原)이 쓰다. 주거천 고신에 발문을 쓴 사람은 원(元)대의 저명한 학자인 등문원(鄧文原, 1259~1329)과 교궤성(喬簣成)이었다. 이들 발문에 등장하는 노공(魯公)이란 다름 아닌 당의 이름난 서예가인 안진경(顔眞卿, 709~785)이다. 주거천과 동시대에 살았던 안진경이 주거천 고신을 썼다고 원대까지 전해왔던 모양이다. 이후 중국 명청(明淸) 시대의 많은 저술들은 이를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면서 많은 문헌 속에서 인용하였다. 그런데 1960년에 일본의 학자인 오오바 오사무(大庭脩)는 당시까지 전해오는 당의 고신 21점을 망라한 논문 「唐 告身의 古文書學的 硏究」(『西域文化硏究』(3), 法藏館, 1960)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의 마지막에서 오오바 오사무는 당나라의 법전에 나타난 조항을 철저히 조사하여 당의 고신은 당의 삼성(三省) 중 상서성(尙書省) 이부(吏部)에 소속된 영사(令史)가 작성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실제로 주거천 고신에도 ‘令史 侯朝’가 등장하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주거천 고신은 1331년부터 1960년까지 무려 649년이나 걸려서 안진경이 아니라 영사인 후조(侯朝)가 쓴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과연 기록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 도면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놀라운 사실이 그 이면에 숨겨져 있다. 1929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산재한 왕실 자녀들의 태실을 지금의 파주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는 일을 추진했다. 태실 안에 있던 태를 담은 항아리와 지석(誌石)을 빼내어 옮겨 묻는 일이었다. 겉으로는 전국의 태실을 안전하게 통합 관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한 속셈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궁궐에 있던 태봉까지도 예외 없이 찾아내어 서삼릉으로 옮겼다. 이 도면은 1929년, 궁궐 안에 있던 세 곳의 태봉을 봉출해 간 자리를 그린 것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장서각의 필사본 도서인 『태봉 胎封』에 상세한 기록이 있어 그 실상을 알게 된다.  창덕궁에 위치가 확인된 것은 영왕과 덕혜옹주, 고종 제8남의 태실 등 세 곳뿐이다. 현재 세 분의 태실은 서삼릉으로 가있지만, 태항아리는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했지만, 태실은 왕조의 번창과 생명 존중의 뜻이 담긴 조선왕실의 주요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창덕궁의 태봉이 있던 자리에 작은 표석 하나 세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도 3. 동궐도, 견본채색, 584×273㎝, 고려대 박물관 도 1 에 그려진 공간을 동궐도에 표시하면 붉은색 원이 있는 지점임.  창덕궁의 후원( 後園) 이자 일제강점기 때 비원( 秘苑) 으로 불린 장소다. 사진2. 등문원 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