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보기 맨위로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11월호 AKS
 
커버스토리
한중연소식
옛 사람의 향기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학 연구동향
세계와 함께하는 한국
새로 나온 책
뉴스 라운지
되살리는 기록유산
틀린 그림 찾기
한국학중앙연구원 페이스북 페이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트위터
AKS 옛 사람의 향기
 
연구원 홈페이지 한국문화교류센터 Newsletter 한국학진흥사업단 Newsletter 관리자에게
소박한 백자 접시 위에 놓여진 푸른 한 글자 ‘祭’ [사진] 하은미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 최근 막을 내린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 청화(靑畫), 푸른 빛에 물들다” 전시(2014.09.30.~11.16.)는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청화백자를 한 곳에 모아 보여주는 의미있는 전시였다. 흰 바탕에 푸른 안료로 그림을 그려 장식한 청화백자의 아름다움과 기술적인 가치, 중국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었던 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실제 당시 청화백자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가졌던 인식을 전시에 투영하여 보여주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빛이 넘쳐흘렀던 전시장에서 도리어 눈을 끌었던 것은 한 가운데 푸른색으로 ‘祭’자가 쓰여진 소박한 백자 접시였다. 일반적으로 국가 제사의 경우에는 엄격한 규범에 의해 제작된 유제(鍮製) 제기를 사용하였으며 목기, 칠기 등도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이 전시에 출품된 ‘祭’자가 시문된 이 청화백자 제기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조선 초기 조선을 내왕한 명나라 사신들이 가져온 선물 중에는 중국의 청화백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청화백자가 조선의 조정에 선보이면서 조선은 우리 땅에서 우리 힘으로 이 그릇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려와는 다른 조선의 실정에 맞는 그릇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따르면 조선 세종조(1418-1450)부터는 어기(御器)로서 백자기를 전용(全用)하고 세조조(1455-1468)에 이르러서는 채자(彩磁)도 병용(倂用)하였다고 한다. 즉 조선은 그들의 그릇으로 백자를 선택하였고, 청화백자도 이에 준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세종 29년(1447) 6월의 기록에 따르면 왕이 예조에 명하여 문소전(文昭殿)과 휘덕전(輝德殿)에서 조석으로 바치는 상식(上食)에 쓰였던 은그릇들을 백자기로 대신하라고 하였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는 15세기 경 제작된 보물 제1056호 <백자 청화철재 삼산문(三山紋) 항아리>는 대표적인 백자 제기로, 조선시대 길례에 사용하는 술항아리인 산뢰(山罍)이다. 또 보(簠), 궤(簋), 작(爵), 준(尊), 잔(盞), 향로(香爐), 용준(龍尊), 희준(犧尊), 상준(象尊) 등의 다양한 제기들이 백자로 제작되어 현전하고 있다. 이러한 그릇들은 중종 23년(1528)의 “제향소(祭享所)에서 쓰는 사기(沙器)가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영경전(永慶殿) 등에는 모두 동기(銅器)를 사용하고, 그 앞에 배설(排設)하는 사기(沙器)는 사옹원으로 하여금 들이게 하는 것이다”라는 기록을 통해 일부 사기(백자 혹은 분청사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제기가 유기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백자 제기가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지방 향교나 관청, 일반 사대부가에서 사용되는 제기를 분원(分院)에서 제작한 흔적을 여러 가마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백자의 질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둥근 원 안에 ‘祭’자를 해서체로 정갈하게 써 제기라는 용도임을 밝힌 것은 전에 없는 일이었다. 이후 이러한 유형의 백자 제기가 크게 유행하면서 제기접시, 편틀, 탕기(湯器), 작(爵), 시접(匙楪), 모사기(茅沙器), 향로(香爐), 술병 등으로 이루어진 한 세트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굽다리를 모깎기하는 정도로 특별한 장식은 없으나 제기로서의 엄정함을 지니고 있다. 이 문서에서 임청각의 매도인으로 등장하는 중화민국 회인현의 이상희는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초명이다. 고성임씨 임청각파의 17대 종손으로 임청각에서 태어난 임청각의 주인인 그가 1913년 6월, 400년을 지켜온 대종택을 팔아버리니, 이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석주 이상룡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으로,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분이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에 대한 충격으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을 시작하였고, 1895년(고종 32)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본격적인 의병항쟁에 돌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과 뒤 이은 우리 민족의 의병투쟁이 일본군에 패배한 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민주제도 등 서양의 신학문을 적극 취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즈음 임청각이 소유한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종들을 해방하니, 안동의 유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였다. 결국 1910년 8월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고 몇 달이 지난 1911년 정월, 석주 이상룡은 식솔과 자신을 따르는 50여 가구를 거느리고 서간도 망명길에 오른다. 망명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서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하니, 경학사라는 항일 자치 결사와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의 설립이 그것이다. 경학사는 부민단을 거쳐 한족회로 개편, 발전하였고, 신흥강습소 역시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1920년 서로군정서 창립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1912~3년에 걸친 흉작은 이와 같은 서간도에서의 초기 활동에 운영난을 초래하였다. 와중인 1913년 6월, 석주의 아들 준형(濬衡, 1875~1942)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400년 종택인 임청각과 그 대지 및 인근 산판을 방매하기 위한 귀향이었고, 아버지의 초명인 ‘이상희’란 이름으로 가옥과 토지를 팔고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이 때 작성된 문서가 바로 이 ‘임청각매매증서’이다. 이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정확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없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되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그림3 . 석주 이상룡(1925년 상해임시정부 국무령 재직시)석주선생은 이후로도 서로군정서 독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매진하였으며, 우리 땅에 돌아오지 못한 채 1932년 만주 땅에서 생을 다하게 된다. 석주선생 뿐이 아니었다. 그 아들 준형과 손자 병화(炳華, 1906~1952)가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애국장과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두 아우 상동(相東, 1865~1951)과 봉희(鳳羲, 1868~1937)가 또한 그러하여 애족장과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여기에 조카 등을 합치면 임청각 일가에서만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으니, 항일독립운동을 볼 때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임청각의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동안 임청각은 이른바 ‘불령선인’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 하여 핍박을 당했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연결하면서 굳이 노선을 꺾어 임청각의 경내를 가로질렀고, 결과로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을 철거당하기도 하였다.조국이 해방되고 임청각의 사람들이 임청각에 돌아왔지만, 형편은 여전히 어려워 입에 풀칠하기도, 학교를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석주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선생의 경우 고아원을 전전하기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청각의 사람들은 학비와 생계를 위해서는 단 한 평의 토지, 단 한 칸의 가옥도 팔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임청각을 지켜왔다.이제 임청각의 사람들은 500년을 지켜온 임청각과 임야 1만 2천여 평을 국가에 헌납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임청각이 단지 일개 가문의 종택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자 독립운동의 역사 현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산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석주선생의 자손이 일제의 호적을 거부함에 따라 4인의 친족에게 명의 신탁되어 70년간 방치됨으로써 불분명해진 소유권이 발목을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한 편에서는 송병준과 이완용 등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토지환수소송을 제기하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불의에 영합하고, 개인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권력에 복무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이 되고, 부와 권력을 누린 이들의 토지였다. 이제는 탐욕과 방종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석주선생과 임청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명가로서의 가치 때문은 아닐까? 사실 이 시기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왕실 백자를 제작하던 관요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청화 안료인 코발트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할 여력조차 없었던 처지에 놓여있었다. 궁중 행사에 사용할 청화 화준(花尊) 한 쌍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워 종이에 그려 붙이거나 무늬가 없는 백자 위에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데 청국 사신을 영접할 때 비에 젖기라도 하면 번져서 민망할 지경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조상에 대한 예(禮)를 실천하기 위한 도구인 제기를 값비싼 청화 안료를 사용한 백자로 사용했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예가 얼마나 극진한 것인지 보여준다. 이에 더하여 계층 간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기(御器)로서의 백자의 사용을 제한하였던 것이 광해군(1608~1623 재위) 때부터 일반 사대부에게도 허용되었다. 부를 축적한 부농이나 상인, 중인계층 등은 부를 이용하여 신분계층을 뛰어 넘어 왕실이나 사대부들을 닮고자 했으며 그들의 문화를 향유하고자 했다. 전시장 한 켠에서 만났던 소박하지만 소박하지 않은 청화로 장식된 백자 제기가 전례없이 많이 만들어지는 양상은 바로 이러한 변화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