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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6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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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읽는 사람과 명분을 세운 사람 [사진] 안장리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 요즘에 드라마 “정도전”이 인기이다. 나라의 주인이 바뀌는 격동의 시대, 파란만장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살아 돌아온 듯 화면을 채운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은 정도전과 정몽주이다. 정도전은 시대를 읽는 사람이었고 정몽주는 명분을 세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정도전과 정몽주의 싸움의 결말을 안다. 아니 안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읽은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웠고 명분을 세우던 정몽주는 결국 고려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정도전이 정몽주를 이긴 것이다. 명분의 허망함과 시대의 엄정함을 깨닫게 된다. 드라마에서 이성계가 정몽주에게 썩은 고려를 지키려는 이유에 대해 묻자 정몽주는 이렇게 대답한다. “부모가 못난 부모라고 외면하면 그것을 어찌 자식이라 하겠습니까? 못난 부모라서 더 애착이 가고 가슴이 아립니다.” 이 대답은 송나라의 충신 문천상을 생각하게 한다. 문천상은 “부모가 병이 위중하면 비록 나을 수 없는 것을 알지라도 약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정몽주와 문천상을 한국과 중국의 대표적 충신으로 견준 윤두수는 『성인록(成仁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오호라, 매서웁도다. 오호라, 위대하도다. 사대부가 평소 임금의 녹을 먹을 때는 그 녹이 후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르기를, “나는 나랏일에 능하다.” 한다. 그러나 털끝만한 이해득실이라도 당하게 되면 그 마음이 동요되고 그 지조가 무너지지 않을 자가 드무니, 이 책을 보는 사람치고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다시 정도전과 정몽주의 시대인 여말선초로 가보자. 정도전은 계속 시대를 읽었다. 태조가 계비 강씨의 소생 방석을 총애하는 것을 보고 방석을 세자로 삼게 했으며, 방석을 인도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다 태종 이방원과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피살되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모두 태종에게 피살된 셈이다. 신하란 몸을 바쳐 임금을 섬겨야 하므로 위태로울 때는 임금을 위하여 의롭게 죽어야 하는데, 이를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충의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 5백 년 말엽에 다만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어찌 천명과 민심의 돌아가는 곳을 몰랐겠습니까만, 오직 그 섬기는 임금을 달리하지 아니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죽어 후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태종께서는 부득이 천명에 응하고 민심을 따랐지만, 충의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았기 때문에 그 방도를 다해 권장하여 만세를 위하여 절의의 큰 근본을 세웠습니다.” 윤두수는 시대를 읽는 사람을 꾸짖고 지조를 지키는 사람을 칭송한다. 명분의 허망함과 시대의 엄정함은 이미 결판이 났는데 윤두수는 왜 시대를 읽는 사람을 꾸짖는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시대를 읽는 사람은 명분을 세운 사람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 장서각 소장 삼강행실도이 말은 정몽주가 시대를 읽지 못한 것이 아니고 시대를 읽었지만 명분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명분을 세운 사람은 시대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며 결국 시대를 읽은 사람보다 상위의 사람이라는 평가이다. 어느 역사학자는 정몽주가 죽을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당대 국무총리급의 지위에 있었던 정몽주가 이성계와 적대적인 상황에서 문병을 가면서 왜 시종 하나만 데리고 갔는지 의문스럽다고 하였다. 시대를 읽기는커녕 당시 상황조차 읽지 못한 것 아니냐는 반론이기도 하다. 정몽주가 택한 명분이 진정으로 ‘큰 실리’라는 것을 납득하기 쉽지 않은 요즘이다. 이제 임청각의 사람들은 500년을 지켜온 임청각과 임야 1만 2천여 평을 국가에 헌납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임청각이 단지 일개 가문의 종택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자 독립운동의 역사 현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산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석주선생의 자손이 일제의 호적을 거부함에 따라 4인의 친족에게 명의 신탁되어 70년간 방치됨으로써 불분명해진 소유권이 발목을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한 편에서는 송병준과 이완용 등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토지환수소송을 제기하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불의에 영합하고, 개인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권력에 복무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이 되고, 부와 권력을 누린 이들의 토지였다. 이제는 탐욕과 방종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석주선생과 임청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명가로서의 가치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 정몽주를 추숭했다. 정몽주에게 당대 최고의 시호인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세종은 『삼강행실도』에 정몽주을 올리게 하여 충신의 사표로 삼게 하고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게 하였다. 정몽주는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선조 때 숭양서원과 충렬서원에 모셔졌고, 숙종, 영조, 정조 때에도 계속 국은(國恩)이 이어졌다. 정도전은 어떻게 되었는가? 고종대에 이르러서야 경복궁의 전각명을 짓고 송축한 공이 참작되어 신원되었을 뿐이다. 역사는 이미 명분을 세운 사람이 시대를 읽은 사람에게 이겼음을 증명한 셈이다.